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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55명의 회원/손님들과 함께 축일을 지내며 무척 기뻤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냐시오 영성을 살아나가려고 노력하는 우리들의 모습들이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느껴지시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스쳐지나갔습니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준비와 마무리 청소까지 도움 주셨습니다. 일일이 인사를 드리지 못하였지만 감사드리고, 총무님을 비롯해서 임원진 (특별히 사도부원들) 들에게도 심심한 감사올립니다.
윤이냐시오 부제님도 함께 해주셔서 무척이나 풍부한 잔치였습니다. (오늘 축일 축하드립니다!)

아루페 신부님의 기도문 "사랑에 빠지십시오" 를 오늘 아침 다시 읽어보면서 우리들도 하느님과 사랑에빠져서 행복하고 즐거운 삶의 여정의 길을 함께 걸어가기를 소망해봅니다. 


이 글은 아루페 신부님께서 예수회원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여러분들께도 도움이 될 내용이기에 올립니다.

(손우배 신부)

 

 

“사랑에 뿌리내리고 기초를 세워”

- 베드로 아루페 신부님의 마지막 말씀(1981년 연설 중에) -

 

Fr. Pedro Arrupe, SJ

 

 

 

옆구리에 상처를 입으신 이 십자고상을 접하고 묵상할 때, 우리는 그분에게서 하느님의 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숨겨져 있는”(콜로 2,3)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께 더욱 가까이 다가갈 때, 우리는 그분을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믿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 행동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필연코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예수회 제28대 총장 베드로 아루페 신부의 강론, 1973년 로마)

 

1981년 2월 15일, 베드로 아루페 신부는 로마 예수회 총원에 개설된 ‘이냐시오 과정’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예수회에 그의 마지막 연설을 하였다. “사랑에 뿌리내리고 기초를 세워”라는 제목으로 이루어진 이 연설에서 그는 “이냐시오적 체험의 중심”에 관한 주제에 대해 언급하였다. 연설의 마지막 부분은 개인적 친밀감을 담은 부분인데, 이는 기대로 가득 차 숨을 죽이고 있던 청중들에게 전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글은 그의 연설을 요약한 것만이 아니라, 그가 영적으로 남긴 마지막 증언이기도 하다.

 

이제 제가 연설을 마치고 여러분 모두와 앞으로 제가 할 이 말들을 읽게 될 예수회원 모두에게 사도 바오로의 말을 빌려 마침 인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형제 여러분께 평화가 있기를, 그리고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믿음과 사랑이 있기를, 꺼지지 않는 사랑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은총이 있기를 빕니다.

 

이냐시오 영성의 핵심

 

사랑이 그리스도교 영성과 이냐시오 영성의 핵심임을 보게 된 이 시점에 이르러 저는 마지막 성찰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드린 말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 형제들과 그리스도 그리고 성부를 위한 사랑(봉사)은 우리 애덕의 유일하고 분열되지 않는 목적입니다.

 

2. 사랑은 이냐시오 영성을 잘못 이해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이분법적 태도와 긴장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애덕 안에서 믿음과 정의 사이의 긴장이 해소됩니다. 믿음은 ‘fides informata caritate’가 말하듯이 애덕으로 채워져야 하고, 정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리하여 정의의 가장 고귀한 형태는 정의를 추구하는 애덕인 것입니다.

 

자신의 완덕과 이웃의 완덕 사이의 긴장도 있습니다. 둘 다 하나이며 같은 애덕의 완성이어야 하는데, 이것은 자신 안에서 내적으로 또한 이웃에게서 외적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 ‘활동 중의 관상’ 안에서 기도와 사도적 활동 사이의 긴장이 해소됩니다.

 

3대 서원(가난, 정결, 순명)의 동기와 그것을 준수하려는 태도가 애덕에 의해 고취되고 독려되는 한, 3대 서원에 내재한 긴장은 사라집니다. 이는 네 번째 장엄서원(교황님께의 순명)에도 해당됩니다.

 

식별과 순명 사이의 긴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애덕은 식별의 시작과 결과에 모두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아가페’가 있을 때 하느님의 뜻을 식별할 수 있고(로마 12,2), 이는 애덕으로 주어지는 직관력입니다.(에페 3,18-19; 콜로 2,2) 순명 또한 그 같은 하느님 뜻의 표현입니다. 장상이나 수하나 모두 사랑에 합당한 직관력과 더불어 애덕으로 감화되어야 합니다.

 

3. 사랑은 현대 세계의 사악함(anomia) 때문에 생기는 사도직 장에서의 문제에 해결책을 줍니다.

 

4. 사랑은 우리 모두를 결합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행적을 심연에서 드러나게 합니다.

 

5. 사랑은 또한 우리 삶과 행위의 심오한 요소인데,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사랑이신 위격)을 받아 그분처럼 ‘아빠, 아버지!’하고 부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깊이와 넓이로 이해한 사랑(애덕과 자비 모두)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통합하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예수회원의 삶을 통합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생물학적인 상징은 심장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성심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이고 신적인 사랑의 원천과 심원으로 이끌면서, 우리의 개인적 영성과 단체의 영성을 대변하고 고취하는 자연적인 상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연설을 마치면서 저는 우리 예수회에 제가 믿고 있을 뿐더러 말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는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수련자였을 때부터 제가 확신해 온 것은 소위 성심에 대한 신심 안에는 이냐시오의 정신과 개인적 성숙 그리고 사도적 결실을 위한 특별한 힘(ultra quam speraverint)의 원천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 확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저의 총장직 재임 기간 동안에 이 주제에 대해 별로 언급한 적이 없었다는 점에 놀라는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사목적’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최근 수십 년간 ‘성심’이라는 표현 자체가 다소 감정적이고 때론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이 표현이 지나간 시대의 양식을 취하거나 그와 관련된 용어라는 인상에서 비롯하는 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인 것에 가까운 그런 태도가 점차 바뀔 것이라는 확신에서, 시간이 좀 흐르도록 놓아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제가 확신해 왔고 지금도 확신하고 있는 것은 여러 교황님들께서 아름답게 언급하신 그 깊은 영성, 그토록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성서적 상징물이자 원천적 어휘인 ‘심장’으로 표현되는 그 영성의 거대한 가치가 곧 되살아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이 때문에 비록 아쉬움은 있지만 이 주제에 대해 거의 언급하거나 글을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대화에서는 자주 언급하였듯이, 이 신심으로부터 저의 내적 삶은 가장 심오한 사랑의 원천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이냐시오 카리스마에 대한 일련의 회의를 마치는 이즈음에 저로서는 제가 그동안 침묵하였던 부분에 대해 우리 예수회에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이해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더불어 침묵하지 않고 말씀드리고 싶은 저의 확신은 예수회원인 우리들 모두가 이 신심이 예수회에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서 성찰하고 식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에는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 성심의 사랑에 힘입어야 극복할 수 있는 도전과 기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예수회에 남기신 마지막 메시지

 

이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었던 마지막 메세지입니다. 사랑에 관련되는 일을 강요하거나 의무를 지우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메세지에 대해 숙고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그 메세지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전하는지 깊이 성찰하여 주십시오. 만약 우리의 영성, 심지어 ‘수도회’라는 ‘제도(制度)’적 영성 안에 담긴 이 위대한 보물이 겉만 화려하다는 이유로 소홀히 취급받는다면 그만큼 서글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께서 저에게 조언을 원하신다면, 예수회에 54년을 살았고 총장으로서 16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그리스도 성심께 대한 이 신심에는 무한한 힘이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그 힘을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아직 스스로 그렇게 해보지 않았다면 그 안에 더욱 깊이 들어가 주님께서 이끄시고 허락하시는 대로 각자의 삶에 적용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총이 있습니다.

 

예수회는 이 상징과 이 상징이 선포하는 현실에 담긴 ‘역동성’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심입니다. 아마 교황님들과 본회의 총회들과 본회 총장들이 끊임없이 반복하셨던 것을 받아들이는 교회적 겸손함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저는 예수성심께 대한 광범위하고 열정적인 신심만큼 영적인 쇄신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증거는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우리의 사도직은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될 것이며, 우리들 각자의 삶과 사도적 활동 안에서 그 효과를 즉시 보게 될 것입니다.

 

어떤 상징과 그 상징을 구체적으로 표현함으로 해서 드러나는 신심보다 우리들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교만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성부께서 당신의 진리와 신비를 감추시고 오히려 작은이들과 스스로를 작은이들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만 이를 드러내 보이시니, 우리는 세속적인 지혜와 총명함에 동참하지 말도록 하십시오. 심오한 회개를 위한 첫 번째 조건인 소박한 마음을 가지도록 하십시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만약 개인과 예수회 차원에서 너희가 하늘나라의 보화 안으로 들어가고,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데 있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협력을 하고자 한다면, 너희 자신이 너희가 섬기려고 하는 이들과 같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라. 너희는 가난한 이들이 많은 책보다 너희들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고 말해 왔으니, 그들에게서 배우라. 이 단순한 가르침이 곧 내 성심 안에 있는 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 그것이 바로 제 삶에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정의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제가 예수회에 입회한 이래 저의 이상이었고, 지금도 이상입니다. 그분은 나의 길이었고 또 여전히 나의 길입니다. 그분은 나의 힘이었고, 또 언제나 나의 힘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단지 그리스도께서 내 삶으로부터 떠나버린다면 뼈나 심장 그리고 머리가 없는 몸처럼 바로 무너지고야 말 것이라고 말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