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과 다윗; 실패 그리고 성공
사울의 등장은 이렇습니다. 별무신통입니다: 1사무 8,6: 사무엘은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우리에게 세워 주십시오.” 하는 그들의 말을 듣고 마음이 언짢아 주님께 기도하였다.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의 말을 들어 주어라. 그러나 경고하여라. 그들은 그의 종이 될 것이며, 스스로 뽑은 왕 때문에 울부짖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백성들은 “상관없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다른 민족들처럼, 임금이 우리를 통치하고 우리 앞에서 전쟁을 이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은 상관없습니다. 자기들의 왕만 상관있습니다.
사무엘과 키스의 아들 사울을 만남
사무엘은 벤야민 지파 사람의 힘센 용사 키스의 아들 사울을 만나게 됩니다. 사울은 암나귀를 찾으러 여러 지방을 다닙니다. 춥 지방이 들어갔을 때 그의 종이 말합니다. 이곳에 하느님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분을 찾아갑시다. 그가 혹시 우리에게 가야 할 길을 일러 주실 지도 모릅니다. 종이 더 똑똑합니다.
한편 주님께서는 사무엘은 귀를 열어 주시며 “바로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내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잘 보십시오. 사울은 처음에는 무척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저는 이스라엘의 지파 가운데에서도 가장 작은 벤야민 지파 사람입니다. 그 중 가장 보잘것없습니다.”
사무엘은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을 맞춘 다음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어 그분 소유인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
그래서 하느님께서 이제 사울의 마음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사울이 이제 새 마음, 깨끗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사울에게 들이닥쳐, 황홀경에 빠져 예언하였습니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자, 길갈로 가서 왕정을 새롭게 다집시다.”하고 말하자, 온 백성은 길갈로 가서 주님 앞에서 사울을 임금으로 세우고, 주님께 친교 제물을 바쳤습니다. 거기에서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물론 사무엘도 기뻐하였지요.
사울은 이스라엘 왕권을 차지하고 나서, 하느님의 영으로 차서 사방에 있는 모든 원수들, 곧 모압과 암몬 자손들과 에돔, 초바 임금들과 필리스타이인들과 싸웠습니다. 그는 그들을 패배시켰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늘 그와 함께 했습니다. 그는 아말렉도 용감하게 쳐부수어 이스라엘을 약탈자들의 손에서 빼내었습니다.
사울의 잘못
그런데 사울은 잘 나가던 시절에 아말렉 성읍에서 잘못을 저지릅니다. 항상 잘 나갈 때가 문제입니다. 아말렉 임금 아각을 사로잡고 양과 소와 기름진 좋은 것들과 새끼 양들, 그 밖의 좋은 것들을 모두 아깝게 여겨 완전히 없애 버리지 않고, 쓸모없고 값없는 것들만 없애 버렸습니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먼저 사무엘을 사울에게 보내십니다. 한 번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무엘이 말합니다. “주님이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 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사무엘은 진심으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사뭇 겉으로만 들었습니다. 임금님께서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다고. 그러나 사무엘은 알았습니다.그가 결코 후회하고 야훼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울이 겉으로만 간청합니다.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만, 원로들과 제 백성과 이스라엘 앞에서 제발 체면을 세워 주십시오.”
사울은 주님께 예배를 드렸지만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체면이었습니다. 그는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정작 하느님께 잘못을 해 놓고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문제입니다.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보지 않았고 사울을 두고 슬퍼하였습니다. 주님께서도 사울을 이스라엘 위에 임금으로 세우신 일을 후회하였습니다. 사울과 사무엘의 갈등이 점점 깊어집니다. 사무엘이 사울의 행동을 비판했던 것은 사울이 출전했던 전투, 아말렉과 벌인 전투였습니다. 하느님의 명령을 받고 치른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주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의 갈등은 심각한 위기를 불러 왔습니다. 사무엘은 사울 대신 다른 왕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을 결혼 생활로 이끄신 것을 후회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희망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잃었든지 다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뉘우치는 삶, 새로운 삶을 살았고, 다 돌려받았습니다. 왕권, 성령, 새 마음을 돌려받았습니다.
두 인물,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면서 잘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 삶과 연결지어 묵상해 보십시오, 두 사람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마음을 잘 비추어 보십시오.
사울은 뉘우치지 않았고 다윗은 뉘우치는 마음을 지녔습니다. 다윗이 왜 시편 51을 썼습니까? 그는 죄를 지었지만 사울의 삶과 그의 죄의 결과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비추어 보면서 새로운 마음,성령을 청했습니다.
사울의 몰락과 다윗의 성공 이야기
이어서 사울의 몰락과 다윗의 성공 이야기가 나옵니다.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하고만 있을 셈이냐?”
하느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울을 놓고 슬퍼하는 사무엘에게 다시 새로운 사명이 주어집니다. 왕권에 대한 사무엘의 절망은 무척 컸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느님의 사명을 받은 그는 기름을 부수어 왕으로 세운 사울을 두고 라마로 떠납니다.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해. 사울이 왕권을 행사하고 있지만 그는 백성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을 알고 있을까요?
“제가 어떻게 갑니까? 사울이 그 소식을 들으면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한편 두려워하면서 그는 주님 말씀을 따라 그 성읍의 원로들이 떨면서 그를 맞이합니다.
“좋은 일로 온 겁니까?”
사무엘이 대답합니다. “물론 좋은 일이지요. 나는 주님께 제사 드리려 온 것이오.”
이사이의 아들들이 모여 있었지만 모두 주님께서 뽑은 이가 없었습니다. 양을 치고 있던 막내는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사무엘이 기름을 붓습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들이닥쳐 줄곧 그에게 머물렀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영, 곧 성령께서 그와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한편 사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호! 애재라! 주님의 영이 사울을 떠나고 대신 주님께서 보내신 악령이 사울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사울은 비파를 잘 타는 다윗을 보내라고 말합니다.다윗은 사울에게 와서 시중들게 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몹시 사랑하여 그를 자기 무기병으로 삼았습니다. 무기병은 바로 자기 목숨을 맡기는 사람에게 시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영이 사울에게 내릴 때마다 다윗은 비파를 탔습니다. 그러면 악령을 물러가고 사울은 회복되어 편안해졌습니다.
이렇게 기묘하게 사울과 다윗 사이의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 관계는 처음에는 무척 사랑하는 관계이었습니다. 서서히 등장하는 다윗은 원래 이렇게 사울과 서로 좋은 관계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만 사울이 다윗을 시기 질투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 좋던 관계가 어그러지고 맙니다.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과 싸우려고 하자 사울이 말립니다.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전사였지만 너는 아직도 소년이 아니냐?” 정말 걱정이 되어 말립니다. 그러나 다윗은 말합니다. “임금님의 종인 저는 저 필리스티아인을, 저 할례 받지 않은 자를 죽이겠습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허락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빈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필리스티아인에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다윗은 무릿매끈과 돌멩이 하나로 그 필리스티아인을 누르고 그를 죽였습니다. 이 장면을 그려 보십시오. 그는 그의 칼집에서 칼을 뽑아 그를 죽이고 목을 베었습니다. 필리스타아인들은 저희 용사가 죽는 것을 보고 모두 달아났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실 때에는 진정한 위로와 성공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명령을 순수하게 따르고 그분의 신뢰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이렇게 철저하게 주님의 사람입니다. 다윗이 그 필리아스아 사람을 쳐 죽이고 군대와 함께 돌아오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손북을 치고 환성을 올리며,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울 임금을 맞이합니다.
여인들이 흥겹게 노래를 주고받습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사울은 이 말에 몹시 화를 냅니다.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게 됩니다. 햐. 정말 가관입니다.아들 요나탄보다도 열 살 이상 더 젊은 다윗에게 시기, 질투하다니!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졌지만 두 번이나 몸을 피해 주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는 것을 알고 다윗을 몹시 두려워합니다. 사울은 ‘내 손으로 그를 치지 않고 필리스티아인들 손으로 그를 치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내 사위가 되어 주게.” 하고 자기 딸 미칼을 다윗에게 아내로 내 줍니다. 사울은 주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고, 자기 딸 미칼마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서는 평생 그와 원수가 됩니다.
다윗과 요나탄의 우정
다윗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일, 바로 요나탄과의 우정입니다. 그는 요나탄과 깊은 우정을 이룹니다. 성서 안의 다윗과 요나탄의 우정은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다윗과 요나탄이라는 악단이 여러 개가 있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매형이었습니다. 사울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요나탄은 아버지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다윗을 이미 왕으로 정해놓으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원래는 왕의 자리를 놓고 다투어야 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들의 우정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왕권을 놓고 싸움을 벌여야만 했던 원수 사이였을 것입니다. 사울이 몇 번씩이나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때 요나탄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요나탄은 다윗에게 있어서 생명의 은인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다윗과 요나단의 각별한 우정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야기를 다 하고 나자, 요나탄은 다윗에게 마음이 끌려 그를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게 되었다.”(1사무 18,1)
“요나탄은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여 그와 계약을 맺었다. 요나탄은 자기가 입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고, 군복과 심지어 칼과 활과 허리띠까지도 주었다”(1사무 18,3-4).
“요나탄은 다윗을 무척 좋아하였기 때문에 이를 다윗에게 알려 주었다.”(1사무 19,1).
“요나탄은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사랑으로 다윗에게 다시 맹세하게 하였다.”(1사무 20, 17).
다윗도 요나단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며 의지하였습니다. 그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털어놓았고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요나탄이 죽자 이렇게 울면서 탄식했습니다.
“나의 형 요나탄, 형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프오. 형이 나에게 그토록 소중하였고, 나에 대한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도 아름다웠소.”(2사무1, 26).
다윗과 요나탄은 그들 사이의 우정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들을 뛰어넘어 아름답고 순수한 그리고 진정한 우정을 꽃피웠습니다. 다윗과 요나탄은 이런 우정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하여 영원한 우정을 약속하는 언약까지 맺었습니다. 다윗이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이 17살쯤이었습니다.
그 후 13년 동안 사울에게 쫓겨 다니다가 서른이 되었을 때에 헤브론에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헤브론에서 5년 정도 다스리고 있었을 때에 사울과 요나탄이 전사하고 그의 막내아들 이스 보셋이 왕위에 오르게 되어 2년을 다스립니다.(2다윗 2,10). 그때 이스 보셋의 나이는 40 살이었습니다.
적어도 요나단은 40대 후반에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이 30살에 헤브론에서 왕이 되어 다스리기 시작하고 5년 반이 지날 즈음에, 다시 말해 다윗이 35살 때에 요나단이 죽었으므로, 다윗과 요나단의 나이 차이는 적게는 열 살에서 많게는 열다섯 살까지 납니다.
‘다윗과 요나탄의 이별’
“다윗이 사울에게 이야기를 다 하고 나자, 요나탄은 다윗에게 마음이 끌려 그를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게 되었다.”(1사무 18,1)
“요나탄은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여 그와 계약을 맺었다. 요나탄은 자기가 입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고, 군복과 심지어 칼과 활과 허리띠까지도 주었다”(1사무 18,3-4).
그런데 우정은 어떻게 오는 걸까요? 만약 요나탄이 아버지에 이어 왕이 될 2인자로서 권력에 집착했더라면, 하늘이 울리고 땅이 울리는 함성으로 환영받는 다윗을 위협으로 느껴 “나쁜 놈”이라며 잡아들였을 것입니다. 또 요나탄이 권력 강화에 다윗이 필요해서 다윗을 아꼈어도 깊은 우정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정은 친한 척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라 ‘나’의 마음을 보여주고‘너’의 마음을 보여주며 마음과 마음이 만든 세상을 공유할 때 깊어지는 것이니까요.
얼굴이 보이는 듬직한 남자가 요나탄이니 칼을 찬 뒷모습의 사람이 다윗이겠습니다. 다윗의 칼이 저것인가 보지요? 얼마 전 이스탄불에 다녀왔는데, 거기 톱카프 궁전 박물관에서 다윗의 칼이라고 하는 칼이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묵묵히 빛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황제가 되자 너무 좋았던 어머니 헬레나는 감사의 표시로 기꺼이 성지순례를 떠납니다. 길고도 오랜 순례 길에서 찾아온 성물(聖物) 중에 다윗의 칼이 있었습니다. 톱카프에 전시되어 있는 그 잘생긴 칼이었습니다. 그것이 진짜 다윗의 칼이었는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1700년의 세월을 다윗의 칼로 살아온 다부진 칼은 이미 다윗의 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칼은 원래 요나탄의 칼이었겠지요?
저 그림 ‘다윗과 요나탄의 이별’ 속에 다윗이 차고 있는 저 칼은 요나탄의 것이었습니다. 요나탄이 이별의 정표로 다윗에게 준 것입니다. 칼은 그렇다 치고 목동이었던 다윗의 옷도 생각보다 화려하지요? 그것도 요나탄이 건넨 것입니다. 저 시대에 자신의 옷을 입혀 준다는 것은 자기를 나눠준다는 뜻이었습니다. 일종의 도원결의였던 셈이지요. 요나탄과 다윗은 그만큼 가까웠습니다.
뒷모습만으로도 전달되지 않습니까? 요나탄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는 다윗이 요나탄의 품에서 절망스럽게 흐느끼고 있다는 것을. 저렇게 요나탄의 품에 무너져 있는데도 다윗이 안됐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고 위로할 수 있는, 두려움 없는 우정이 부러울 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후 불레셋과의 전투에서 요나탄이 전사했을 때 다윗이 썼던 조가(弔歌)가 자연스럽습니다. “너 이스라엘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었구나, 나의 형 요나단이여, 나 애통하오. 내게 소중했던 형이여,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소.”
에로스 사랑보다 아름다운 우정을 아십니까, 친구의 처지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는 요나탄 같은 속 깊은 친구가 있으십니까? 사랑이 소유가 아니듯 우정도 소유가 아닙니다. 저 그림을 보니 진정한 우정은 옆에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친구가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뒷모습만으로도 당장 쓰러질 것처럼 지치고 슬퍼 보이는 저 다윗을 보니 아마 저 그림을 그릴 때 렘브란트는 울고 싶었나 봅니다. ‘나’를 받아주는 큰 품에서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을 모두 쏟아내고 싶었나 봅니다. 그 슬픔은 무엇이었을까요? 1642년 작품이니, 그 해는 바로 렘브란트가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를 잃은 해입니다. 렘브란트 나이 서른여섯, 얼마나 암담했을까요? 슬플 땐 울어야 합니다. 슬픔이 응어리져 굳어지기 전에 울고 또 울어야 합니다. 저렇게 서럽게 울고 나면 자신만의 독특한 운명을 받아들일 힘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윗과 요나단을 친한 친구인 것처럼 생각해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다윗과 요나탄의 관계가 모범적인 우정으로 제시되고, 그들의 우정을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한다는 것은 맞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이미 기름부음받은 메시야였고 요나탄은 그것을 알았는지는 몰라도 자신의 마음에 합당한 왕을 그 백성에게 주시려는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따르고자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와 관계를 어렵게 만들면서까지 자기에게 돌아올 왕관을 다윗에게 돌린 요나탄의 행위는 메시야가 오는 길을 여는 진실한 믿음의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요나탄과 다윗의 우정과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요나탄의 우정과 사랑이 보여주고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그 사랑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우정과 사랑이었습니다. 요나탄이 오히려 다윗에게 간곡한 부탁을 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나탄은 하느님의 뜻을 발견한 것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도록 기꺼이 돕고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탄의 우정과 사랑은 어떤 불의 앞에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요나탄은 다윗을 돕기 위하여 ‘활의 약속’을 하고 그대로 실행하게 됩니다. 사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사울 왕과의 식사 자리에 다윗이 나가지 않고 들에 숨었습니다. 초하루 식사자리에 다윗이 없애려는 것을 발견한 사울은 다윗에게 무슨 사고가 생겼나보다 생각하고 넘어갔습니다. 그 이튿날도 다윗이 없자 다윗이 어디 갔는지 요나탄에게 물었습니다. 요나탄은 다윗과 약속한 대로 다윗이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말하자 사울의 의도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사울은 화가 나서 결국 아들 요나탄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왜 없애고 싶어 하는지 그의 말을 들으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살아있는 한 자신의 위치가 위태롭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일찍이 자신의 왕권이 박탈당하고 다른 사람에게 그 지위가 넘어갈 것을 하느님의 목소리를 통해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반드시 죽어야 하겠다.”고 하는 사울에게 요나탄이 “그가 무슨 죽을 일이 한 것입니까?”라며 강하게 만류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요나탄을 향하여 분노를 터뜨립니다. “이 더럽고 몹쓸 계집의 자식 놈아! 네가 이사이의 아들과 단짝이 된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러자 사울은 요나탄을 죽이려고 창을 던졌습니다. 아버지가 다윗을 욕하였으므로 다윗을 두고 슬퍼하였습니다.
요나탄의 우정은 단순한 친구의 우정이 아니라, 불의한 권력 앞에서 항거하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눈물 흘릴 줄 아는 우정이었습니다. 다윗과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 요나탄이 다윗과 활의 약속을 한 대로 활을 쏘고 아이에게 활을 주워오게 하면서, 다윗이 도망해야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다윗의 피신 생활
사울과 다윗 사이가 점점 심각해지고 그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필리스타아로 망명하여 미친 놈 행세를 하여 수염에 침을 흘리기도 하여 몸을 피합니다.
“주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셨으므로 그는 가는 곳마다 승리하였습니다. (1사무 18, 14) 주님이 함께하면 다윗은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크게 승리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사울의 두려움은 점점 커집니다. 그러나 다윗은 결국 도망자의 처지가 됩니다.
그 사이에 사무엘이 죽습니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이 모여들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사울과 혼백을 불러올리는 여자
사울은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그 전에 사울이 주님께 여쭈어 보았으나 주님께서는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예언자를 통해서도 대답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혼백을 불러올리는 여자를 찾아 사무엘을 부릅니다. 사무엘이 답합니다. “주님께서 이미 너를 떠나 네 원수가 되셨는데 어쩌자고 나에게 묻느냐? 주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그대로 너에게 하시어, 이미 이 나라를 네 손에서 빼앗아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다.” 햐. 혼백도 사울에게 네 나라를 빼앗길 것이라고 합니다. 사울은 거의 실성하지요.
과연 사울은 필리스타아인들과의 격렬한 전투에서 죽음을 당합니다. 사울이 자기 무기병에게 명령합니다. “칼을 뽑아 나를 찔러라. 그러지 않으면 할례 받지 않은 저자들이 나를 찌르고 희롱할 것이다.” 그러나 무기병은 너무 두려워 찌르려 하지 않았고 사울은 자기 칼을 세우고 그 위에 엎어져 자살을 하고 맙니다. 이렇게 사울의 죽음은 자살이라는 비극적 결말로 끝납니다.
저의 예수회의 유일한 동기인 박종구 신부는 ‘다윗: 야누스의 얼굴- 욕망의 성취와 인간의 실패’라는 책을 썼습니다. 저는 이 책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그런데 어느 대목에서 소제목을 붙이기를 ‘수수께기’라고 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은 하느님이 그를 세웠을 때,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종과 함께 암나귀를 찾아 집을 떠난 선하고 신실한 인물이었다. 왕이 되려는 꿈도 꾸지 않았을 뿐더러 남을 통치할 상상은 한순간도 하지 않았고, 그럴 꿈은 더더구나 가져보지 않았던 젊은이이었다. 사울은 자기가 추구하지도 않았던 왕의 길을 사무엘의 임무 때문에, 그리고 백성의 요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느님의 선택으로 받았을 뿐이었다. 피할 수 있는 것보다는 피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사울의 운명은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설명할 수 없는 게 더 많은 수수께기 같은 삶이 되었다.”
그런데 정말 수수께기일까요?
자기의 칼에 의해 죽은 사울을 두고 깊은 생각에 잠겨봅니다. 정말 비극적 왕의 최후입니다. 분명히 몰살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사울은 왜 아각을 살려두려 했을까요? 그의 비극적인 최후의 원인은 모두 다 여기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다만 전리품에 눈이 멀어 쓸모 있는 물건들은 챙긴 것일까요? 사울은 온전히 침묵 속에 남겨졌고 철저히 고독한 자가 되어 떠나야 했습니다. 사울은 아각을 사로잡고 전투에서 돌아 올 때만해도 그의 먼 훗날의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없었겠지요. 하느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이가 자신의 손으로 칼에 쓰러지는 자살은 그가 무엇을 뜻하지는 깊이 우리에게 성찰하게 합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은 아말렉을 쳐부수고 돌아와 치클락에서 이틀을 묵게 됩니다. 사흘 째 되는 날 어떤 사람이 찾아옵니다. 다윗이 묻자 그가 대답해 줍니다. “사울 임금님과 요나탄 왕자님도 돌아가셨습니다.” 다윗은 자기 옷을 잡아 찢었습니다. 사울과 요나탄, 그리고 주님의 백성과 이스라엘 집안이 칼에 맞아 쓰러진 것을 애도하고 울며, 저녁때까지 단식합니다. 다윗은 그를 죽이고 말하였습니다. “네 입이 너를 거슬러 ‘제가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를 죽였습니다.’하고 증언하였기 때문이다.”
‘활의 노래’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탄을 생각하여 이런 애가를 지어 부르고는 ‘활의 노래’라 이름 붙여 유다의 자손들에게 가르치라고 일렀습니다. 제목이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일부만 옮겨 봅니다.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살해되어 언덕 위에 누워 있구나.
어쩌다 용사는 쓰러졌는가?
이 소식을 갓에 알리지 말고 아스클론 거리에 전하지 말라.
필리스타아인들의 딸들이 기뻐하고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의 딸들이 좋아 날뛸라.
길보아의 산들아
너희 위에, 그 비옥한 밭에
이슬도 비도 내리지 마라.
거기에서 용사들의 방패가 더럽혀지고
사울의 방패가 기름칠도 않은 채 버려졌다.
요나탄의 활은
살해된 자들의 피와 용사들의 굳기름을 묻히지 않고서는
돌아 온 적이 없고
사울의 칼은
허공을 치고 되돌아온 적이 없었네.
사울과 요나탄은 살아 있을 때에도
서로 사랑하여 다정하더니
죽어서도 떨어지지 않았구나.
사울의 죽음으로 바로 다윗이 왕이 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남쪽 지파의 수장이 되어 통치하고 있었다면 북쪽 이스라엘은 사울의 아들 이스 보셋이 왕이 되어 흐트러진 세력을 하나로 모으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최초의 왕이었습니다. 비록 필리스티아인들과 길보아 전투에서 죽었지만 그는 왕권을 확립한 이스라엘의 영웅이었습니다. 그 왕이 참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사울이 죽음 이후
사울이 죽음 이후 이스라엘 남쪽에서 다윗이 왕권을 강화하여 나갔습니다. 쉽게 말하면, 다윗이 세운 유다 왕국은 사울의 왕권에서 갈라선 세력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교묘하게 사울의 죽음을 이용해 주도권을 자기가 갖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장례를 야베스 길앗 사람들이 치른 것을 알고 이렇게 전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주군 사울에게 그토록 충성을 다하여 그의 장례를 치렀으니, 주님께 복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이제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자애와 성실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군이 세상을 떠났지만, 주먹을 불끈 쥐고 용기를 내십시오. 유다 집안이 나에게 기름을 부어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2사무 2, 5-7)
사울 왕의 장례가 끝났으니 그대들은 모두 알아서 자기를 왕으로 모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종이 바로 다윗 자신이며 ‘기름부음받은 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킵니다.
이야기를 이렇게 이어집니다. 대부분이 죽이고 죽는 이야기입니다. 사울 군대의 장수이며 네르의 아들인 아브네르가 사울의 아들 이스 보넷을 데리고 미하니임으로 건너갔습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 보넷이 나이 마흔에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어 두 해 동안 다스렸습니다. 아브네르와 이스 보넷은 부하들은 기브온으로 출정하였고 요압도 다윗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맞붙었습니다. 비록 요압의 동생 아사엘이 죽었지만 다윗의 부하들은 아브네르의 부하를 삼백육십 명이나 죽였습니다. 요압과 부하들은 헤브론이 이르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사울 집안과 다윗 집안싸움은 오래 계속되었다. 다윗은 갈수록 강해졌고 사울 집안은 갈수록 약해졌다.” (2사무 3,1)
사울 집안과 다윗 집안이 계속 싸우는 동안 아브네르는 사울 집안에서 점점 강해집니다. 아브네르는 사울의 후궁을 범합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선왕의 후궁을 범한 것입니다. 겁을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이스 보넷은 “장군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후궁을 범하였소?”하자 아브네르는 몹시 화를 내며 오히려 이렇게 대꾸합니다. “내가 유다의 개 대가리란 말이오? 나는 오늘날까지 충성을 다하였고 당신을 다윗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소. 당신은 한낱 여자에 관한 잘못을 들어 나를 꾸짖으시오?”신하가 왕에게 하는 말을 보십시오. 이스 보셋은 아브네르를 두려워하여 그에게 다시는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합니다. 오호! 통재라!
이렇게 초라해진 말뿐인 왕이었던 후대의 사울 가문의 수치로 기록되었을 뿐입니다. 아브네르의 행동은 은근히 이스 보셋을 왕의 후궁이기보다는 한낱 여자에 불과했고 왕권은 행사하지도 못하고 위태로워졌습니다. 이스 보셋은 다만 허수아비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네르는 다윗을 찾아가 이스라엘을 넘기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아뿔싸! 아브네르가 헤브론으로 돌아오자 요압은 그를 성문 안쪽으로 데려가 그의 배를 찔렀습니다. 그렇게 요압은 자기 동생 아사벨의 원수를 갚았습니다.
아브네르가 헤브론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스 보셋은 두 손에 맥을 빠지고 온 이스라엘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스 보셋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아브네르가 요압에게 살해되고 어처구니 없이 이스 보셋이 살해됩니다. 마치 단막극처럼 일련의 살해 현장만이 처참하게 남게 됩니다.
그런데, 브에롯 사람 레캅과 바아나가 몰래 들어가 이스 보셋을 죽이고 그의 머리를 다윗에게 가져갑니다. “임금님의 목숨을 노리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 보셋의 머리가 있습니다.” 무슨 큰 상을 받을 줄 알았던 그들은 오히려 손과 발이 잘려 헤브론의 못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다윗은 이스 보셋을 의로운 이로 여겨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고 마치 사울 집안을 위해 이스라엘의 왕을 죽인 자들에게 죽음으로 갚아줍니다.
박종구 신부는 이 모든 것이 다윗의 교묘한 술책이라는 의구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처럼 술수와 음모를 통해 왕권을 강화해 나갈 수 있는 정치적 지략을 가진 영민한 인물이었다. 문자 그대로 수긍하면, 다윗에게 넝쿨째 떨어진 열매는 상대방의 내분과 주인공들의 죽음에서 비롯되었다. 마치 그 동안의 노고가 행운으로 마감되듯이, 다윗에게 통일왕국의 군주가 되는 길이 활짝 열렸던 것이다.”
다윗의 통일국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가서 말합니다. “우리는 임금님의 골육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도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것이다.’하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습니다.
다윗은 의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친구였던 요나탄의 아들 므피보셋을 데려와 말합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 요나탄을 기억하여 너에게 자애를 베풀고자 한다. 너의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땅을 너에게 돌려주겠다. 그리고 너는 늘 내 식탁에서 음식을 먹어라.” 그러자 므피보셋이 절하며 말하였습니다. “당신 종이 무엇이기에 죽은 개와 같은 저를 보살펴 주십니까?” 므피보셋은 예루살렘에 살며 늘 임금의 식탁에서 먹었습니다. 그는 두 다리를 저는 애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세력은 점점 커졌습니다. 2사무 5 10은 이렇게 전합니다. “주 만군의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티로 임금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단과 함께 향백나무와 목수와 석수를 보내어, 다윗에게 궁을 지어 주게 하였다. 그리하여 다윗은 주님께서 자기를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튼튼히 세우시고,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자기 왕권을 높여 주신 것을 알게 되었다.”
다윗은 성공적으로 통일국가를 이룩했으며, 영토를 넓혔고 점령지의 백성들을 잘 다스렸습니다. 주변 민족들을 통해 통일 국가의 공정과 정의를 실현해나갔습니다.
다윗과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와 정을 통하는 죄
그러나 다윗이 큰 죄를 짓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와 정을 통하는 죄를 짓습니다. 죄가 죄를 낳습니다. 다윗과 밧 세바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왕권이 안정을 찾아가던 시점에 이루어집니다. 다윗이 통일 국가 왕권을 누리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다윗의 인간성을 드러내는 이 사건은 마치 은폐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윗은 여인을 강제로 데려와서 함께 부정을 저지릅니다. 여인이 임신이 된 것을 안 다윗은 교묘하게 이 사건을 아무 잘못에 대한 뉘우침 없이 은밀하게 은폐하려 합니다. 우리야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불려 옵니다. 쉽게 말해, 특박을 받은 것이지요. 그런데 그가 너무 순진합니다. 전군이 아직 밖에서 야영을 하는데 자기만 아내와 잠자리를 할 수 없다고 하며 왕궁 문간에서 자고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다윗은 요압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야의 손에 돌려보냅니다. 다윗은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야를 전투가 가장 심한 곳에 배치했다가 그를 칼에 맞아 죽게 하여라.” 이럴 수가 있습니까? 충실한 부하를 죽일 살인의 음모가 진행됩니다. 다윗의 음모은 가담한 요압의 행위에 의해 우리야의 죽음으로 사건은 마감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살인을 자행한 이 사건의 주인공 다윗은 시련을 겪게 됩니다. 하느님의 벌을 받게 됩니다. 다윗과 밧 세바를 성적인 일탈로 빚어진 사건을 통해 단지 인간 본성을 넘어서는 측면이 있습니다. 밧 세바의 의도와 상관없이 여인에 대한 탐욕은 거짓을 만들고 그 거짓은 다시 무죄한 우리야의 죽음을 낳았습니다. 다윗은 비밀로 저지른 죄의 대가를 톡톡히 치루게 됩니다.
다윗은 우리야를 죽이고 밧 세바를 자기 아내로 만들기 위해 요압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예언자 나탄의 은밀한, 그렇지만 아름다운 감동적인 작은 비유를 들려줍니다.
나탄의 비유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부자이고 다른 사람은 가난했습니다.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매우 많았으나, 가난한 이에게는 자기가 산 암양 한 마리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난한 이는 이 암양을 길렀는데, 암양은 그의 집에서 자식들과 함께 자라면서, 그의 음식을 나누어 먹고 그의 잔을 나누어 마시며 그의 품 안에서 자곤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이 암양이 딸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부자에게 길손이 찾아 왔습니다. 부자는 자기를 찾아온 나그네를 대접하려고 자기 양과 소 가운데에서 하나를 잡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잡아 자신을 찾아온 사람을 대접하였습니다.” (2 사무 12, 1-4)
이 비유는 기가 막힌 내용입니다.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가 잘 대비되어 있고 가난함의 극적인 절정이 부유한 자의 행동과 상대적으로 잘 드러나 있으므로 더욱 극적입니다. 이 비유는 인간의 욕구는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더 커진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비유는 가진 자가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 자의 소유를 빼앗습니다. 비유는 아주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아직도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합니다. 다윗은 그 부자에 대해 몹시 크게 화를 내며 그런 몹쓸 짓을 한 놈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는 나탄에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그런 짓을 한 그자는 죽어 마땅하다. 그는 그런 짓을 하고 동정심도 없었으니, 그 암양을 네 갑절로 갚아야 한다.”
그러자 나탄이 다윗에게 말합니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해 주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주님께서 보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느냐? 너는 우리야를 칼로 쳐 죽이고 그의 아내를 네 아내로 삼았다. 너는 그를 암몬 자손들의 칼로 죽였다. 그러므로 이제 네 집안에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때서야 그 비유가 바로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비유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나탄에게 고백합니다.“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이것은 진실한 고백입니다. 그러자 나탄이 다윗에게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임금님께서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임금님께서 이 일로 주님을 몹시 업신여기셨으니, 임금님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반드시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나탄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다윗은 그제야 이 비유가 사실은 바로 실제 일어난 사건임을 깨닫습니다. 다윗이 지닌 모든 것은 하느님이 거져 주신 것이었습니다. 나탄의 비유가 가르키는 바를 곰곰이 다시 생각합니다. 다윗은 하느님이 주신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습니다. 다윗은 자기 지은 죄를 깊이 뉘우칩니다. 자기가 스스로 죽어 마땅하다고 한 자가 자기 자신임을 깨달을 때 그가 느낀 비애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잘못을 의식하지 못하고 부자에게 죽어 마땅하다고, 의기양양하게 행한 잘못의 네 갑절로 갚으라고 다그쳤던 일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몸서리 쳐지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삶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그는 아마도 사울의 삶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죄가 사울의 삶을 파멸로 이끌었는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사울이 삶을 파멸로 이끌고 간 이유와 과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것이 그를 뉘우치고 다시 돌아오도록 이끌어 주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자살을 했습니다. 왕권과 재산과 부하들을 다 잃고 파멸로 나아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하게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잃은 것이 삶을 파멸로 이끈 근본 이유입니다. 성령을 잃자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성령을 얻자 모든 것을 하나씩 얻을 수 있었는데, 성령을 잃자 모든 것을 잃고 마지막으로 생명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큰 소리로 웁니다. 마치 아이처럼 웁니다. 다윗은 사울의 삶을 기억하면서 울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슬픔에 젖어 있고, 우울증에 걸려 있습니다. 그들이 직장을 잃었기 때문입니까? 병이 났기 때문입니까? 술을 마시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증상만을 보면 그런 이유일 수 있지만 우리는 원인을 보아야 합니다, 근본 원인은 성령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질투, 시기 등이 파멸로 이끌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상 그 원인은 성령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성령을 잃게 됩니까? 우리가 의도적으로 하느님을 거부합니다. 성령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깊은 물로 어루만질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저희 가족에게서 성령을 거두지 마십시오.” 우리가 성령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십시오.
여러분들, 안토니오 신부를 아시지요? 안토니오 신부가 어렸을 때, 그는 아주 장난꾸러기였답니다. 그의 집은 숲 속에 있었고, 거기 많은 새들이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까마귀 새끼를 보고 싶었습니다. 새 둥지가 나무 위에 있었고, 그는 나무를 기어 올라갔습니다. 어린 새끼 새를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둥지 가까이 가자 엄마 새가 큰 소리로 울면서 그 동네의 모든 다른 까마귀들을 불러 모았고, 그의 얼굴을 쪼아서 그는 빨리 달아나야 했답니다. 인도의 까마귀는 아주 공격적이라고 합니다. 까마귀는 악령과 닮아 있습니다.
그런데 비둘기는 다릅니다. 어느 아이가 그것을 보러 가면 엄마 새는 둥지에서 날아오르고 다른 나무 가까이서 그냥 바라 볼 뿐입니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다만 그 아이가 무슨 짓을 하는 지를 지켜 볼 뿐입니다. 아이가 아기 새를 가져가면 엄마 새는 눈물을 흘리고 날아간답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엄마 새, 곧 비둘기는 성령을 닮아 있습니다. 까마귀와 비둘기는 이렇게 서로 다르답니다.
이때 다윗이 지은 것이 시편 51입니다.
“하느님, 당신 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의 죄악을 지워 주소서.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에 악한 짓을 제가 하였기에
판결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의로우시고
심판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결백하시리이다.
정녕 저는 죄 중에 태어났고
허물 중에 제 어머니가 저를 배었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가슴속의 진실을 기뻐하시고
남모르게 지혜를 제게 가르치십니다.
우슬초로 제 죄를 없애 주소서. 제가 깨끗해지리이다.
저를 씻어 주소서. 눈보다 희어지리이다.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 1-12)
다윗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깊이 통회하고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울이 죄를 짓고 어떻게 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울에게서 영이 떠나갔습니다. 그는 사울이 계속해서 악령에 시달림을 받던 것을 기억했습니다. 영을 떠나면 어떻게 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잘못으로 결국 성령이 떠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발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라고 빌고 있는 것입니다.
박종구 신부의 맺는 말을 같이 보기로 해요. 생각거리를 주니까요.
“다윗의 성공은 하느님의 은총이고, 사울의 실패는 하느님의 벌이었던가?
희망과 반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이런 질문은 양 극단의 해석을 따르거나 종합하려는 시도가 생겨난다. 다윗의 성공이 이스라엘의 역사적 희망을 낳았다면, 우리는 자칫 사울을 실패한 군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정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두 인물의 갈등과 경쟁을 두더라도 사울의 시대가 다윗의 시대로 성장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겠다. 사울의 왕정체제가 다윗에 이르러 발전적인 형태로 전개되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두 인물 사이에 교환된 왕정의 권력은 한쪽을 강조하는 것보다 권력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는 게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볼 때 사무엘서의 독서가 우리의 시선을 열어 보이는 것처럼 인물들의 성공과 실패는 한 사람의 두 얼굴이다.”
그럴까요? 다만 성공과 실패는 한 사람이 지닌 얼굴의 두 얼굴일까요? 성서의 인물, 사울과 다윗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과연 무엇일까요? 저에게는 분명히 성공과 실패의 인물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누가 성공의 인물입니까? 누가 실패의 인물입니까? 성공과 실패는 누구에 의해 좌우됩니까? 우리는 모두 죄를 짓습니다. 그 죄를 짓고 크게 뉘우치는 사람과 별로 뉘우치는 기색이 없는 사람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사울의 모습을 닮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몇 년 전‘신앙의 해’를 선포했습니다. 우리 신앙을 되돌아보도록 촉구한 것입니다. 우리는 현대에서 믿음을 군사력이나 경제력으로 대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야훼 하느님께서 그들의 왕이셨습니다. 그런데 점점 인간적인 왕을 요구했습니다. 왕이 그들을 만족시키고 보호해 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왕을 주셨습니다. 사울입니다.
사울은 인간의 교만의 결과로 생긴 왕입니다. 그 왕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왕이 죄를 저지르고 결국 자살을 하게 됩니다. 어떤 것으로도 하느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진정 하느님이 되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잘못을 오늘날 우리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본당에서도 살아계신 하느님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원천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치 이것과 같습니다. 뉴질랜드에 갔던 대한항공의 비행기는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갔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거기서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원천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